여기엔 생명의 상징인 보리를 수확하는 달이기도 해 여행길 문득문득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황금빛 물결은 가을 들녘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또다른 시작을 의미하기에 가을의 쓸쓸함 보다는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정취가 있어 좋습니다.
계절의 영향 탓인지 해마다 6월이 다가올 무렵이면 특별히 말러를 좋아하지는 않아도 굳이 말러 교향곡 4번을 찾아 듣는 것도 어쩌면 계절의 축복을 찬미하기 위한 의식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말러 교향곡 4번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 6월과 정말 잘 어울리는 곡으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6월에 가볼만 한 아름다운 명소는 어디인지 묻는다면 서슴없이 고창을 알려주고 싶을 정도로 그 곳에 있는 학동 보리밭의 초록 물결은 풍요로움을 만끽하기에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러나 아침에 바라보는 보리밭이 청명한 기운을 잔뜩 머금어 싱그러움을 만끽할 수 있다면, 낙조를 품어 붉게 물든 저녁의 보리밭은 까닭모를 탄식과 안도의 한숨이 교차되는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마도 보릿고개가 연상되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경험하진 않았지만 내 어린시절엔 보릿고개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초등학교 시절엔 늘상 "혼식을 잘하자, 밀가루를 먹자"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는 졸업할 때까지 이어진 주제였으며, 점심시간엔 혼식을 제대로 했는지 도시락 검사하는 선생님의 눈초리에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목덜미가 움츠러 들었던 것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바로 웃 선배들의 보릿고개 경험담이 머릿속에 생생히 각인된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내 동무들의 도시락도 6월 전과 6월 후의 도시락에 담긴 밥의 양이 달랐습니다. 6월이 다가올 수 록 홀쭉해지는 동무들의 뱃고래를 닮아 도시락 무게도 따라 줄었는데 이는 보리를 수확하는 계절을 지나야만 다시 예전처럼 속이 꽉 찬 도시락을 만날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 추석을 지나면서 보리밥보다는 쌀밥의 혼합비율이 높아졌는데 그래도 꽁보리 밥 도시락은 여전히 눈에 띄었고, 개중엔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는 것도 흔했던 시절이니 이 또한 보릿고개의 영향과 무관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 무렵 거지를 만나는 것도 흔한 풍경중 하나였습니다. "밥좀 줍쇼"하며 목청껏 외치는 거지들에게 갓 지은 따끈한 밥을 내어 주는 것은 은총과 다름없었는데 동냥하는 것도 한결같지는 않았기에 때로는 걸식하는 경우도 생겨 동네 골목마다 놓여있던 커다란 잔반통(음식물 찌꺼기를 모으던 통으로 가축을 키우는 사람이 수거해 가곤 했습니다)을 뒤지는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거지는 공부하기 싫어했던 내겐 탄압의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면 거지된다"는 부모님 말씀이 그 중 무서웠으니 모르긴 몰라도 어린 나이에도 <굶주림>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그 무엇보다 싫었던 듯 싶습니다.

말러 교향곡 4번은 아이의 천상에서의 삶을 묘사한 교향곡으로 아이가 바라보는 천상의 울림을 목가적으로 잘 표현했기에 말러 교향곡중 인기가 많은 곡으로 말러의 수제자이기도 했던 발터는 이 곡을 가리켜 "겸허한 경애의 느낌이 마치 천상의 사랑을 꿈꾸는 목가와도 같다"고 평가할 정도로 곡의 마디마디에 아이가 바라보는 천진난만한 천상의 세계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4악장 전체가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머리에서,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는 싯구절을 절로 떠올릴 만큼 말러의 교향곡 중에서도 고고히 빛나는 밝은 목가풍의 행복한 느낌이 가득찬 곡입니다.
그러나 천상의 세계는 이승에서의 죽음이 있어야만 갈 수 있는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4번의 내면 세계는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순 없겠습니다.
교향곡 4번은 2번, 3번 교향곡과 함께 <뿔피리 교향곡> 3부작으로 분류됩니다. 이는 말러의 초기 가곡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의 연장선상에서 작곡되어 붙여진 애칭으로, 교향곡 4번 4악장은 <뿔피리>가곡집 제 5곡 <지상에서의 삶>의 후속편 격인 <천상에서의 삶>을 노래하고 있지만, 반대로 지상에서의 극심한 가난과 굶주림의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와, 아이를 떠나 보낸 어머니의 서글픈 한이 수반될 수 밖에 없는 곡이기도 합니다.
아이의 굶주림을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가난 속에서 그나마 며칠 뒤면 곡식을 수확해 빵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엄마의 바람도 무색하게 아이는 결국 굶주림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아이러니가 교향곡 4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요.
Das irdische Leben (지상에서의 삶)
"Mutter, ach Mutter, es hungert mich.
“엄마, 아 엄마, 저 무지 배고파요.
“엄마, 아 엄마, 저 무지 배고파요.
Gib mir Brot, sonst sterbe ich!"
저에게 빵을 주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요!“
"Warte nur, warte nur, mein liebes Kind!
“기다려라, 잠자코 기다려라 아가야! Morgen wollen wir ernten geschwind!"
내일 곧 수확하러 간단다!“
Und als das korn geerntet war,
그러나 곡식을 거두어들여 와도
rief das Kind noch immerdar:
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네.
"Mutter, ach Mutter, es hungert mich.
“엄마, 아 엄마, 저 무지 배고파요.
Gib mir Brot, sonst sterbe ich!"
저에게 빵을 주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요!“
"Warte nur, warte nur, mein liebes Kind!
“기다려라, 잠자코 기다려라 아가야!
Morgen wollen wir dreschen geschwind!"
내일 곧 타작하러 간단다!“
Und als das korn gedroschen war,
그리고 곡식 타작이 모두 끝났지만
rief das Kind noch immerdar:
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네.
"Mutter, ach Mutter, es hungert mich.
“엄마, 아 엄마, 저 무지 배고파요.
Gib mir Brot, sonst sterbe ich!"
저에게 빵을 주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요!“
"Warte nur, warte nur, mein liebes Kind!
“기다려라, 잠자코 기다려라 아가야! Morgen wollen wir backen geschwind!"
내일 곧 빵을 굽는단다!“
Und als das Brot gebacken war,
그리고 빵이 다 구워졌지만 lag das Kind auf der Totenbahr.
아이는 죽어서 관에 누워 있네.
(말러 가곡집 -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중)
이에 대해 발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교향곡 4번의 처음 3개의 악장은 천상의 삶을 묘사한다. 1악장에서 바로 이러한 삶을 인식하는 지를 상상할 수 있다. 여기에는 대단히 명랑한 감정과 이 세상 것이 아닌 기쁨이 공존하고 있다. 이는 꽤 매력적이지만 약간은 낯선 존재라고 할 수 있다. 2악장은 "프로인트 하인(Freund Hein)이 춤을 춘다"라고 부를 수 있다. 죽음의 깽깽이가 꽤 기묘한데 그의 연주는 우리를 천국으로 올려 보낸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인트 하인은 독일 구전설화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저승사자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떠돌아 다니는 악사일 뿐이지만 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는 순간,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 우리에게 익숙한 슈베르트의 가곡< 죽음과 소녀> 역시 프로인트 하인과 소녀와의 대화를 주제로 작곡된 곡입니다.
말러는 교향곡 4번 2악장 곳곳에 프로인트 하인을 상징하는 모티브를 빼곡하게 숨겨 두었습니다. 이 모티브는 <죽음의 깽깽이>로 불리고 있는데 2악장중 바이올린 솔로파트가 <죽음의 깽깽이>를 묘사한 것으로 다른 바이올린 파트와 달리 한음 높게 조현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2악장은 <죽음의 무도>라는 별칭이 붙은 악장이기도 하니 가난 속에서 굶주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아이의 지상에서의 삶이 마치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기기만을 빌고 빌었던 우리의 6월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기에 해마다 6월이 다가올 수 록 더욱 애착을 갖고 듣게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반
유명한 곡이니 만큼 수많은 음반이 존재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론 시노폴리 /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음반을 상당한 애착을 갖고 듣고 있습니다.
피셔의 연주는 너무나 리드미컬한 생동감이 넘쳐 지나치게 밝고, 고전적인 명연으로 불리던 클렘페러의 연주는 진중한 느낌이 있으며, 발터의 연주는 곡이 끝날때까지 사랑스럽게 움직이는 프레이즈를 바탕으로 여유와 느긋함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노래가 울려 퍼지기에 다소 제가 생각하는 이미지와 거리가 멉니다.
그나마 길렌이 연주가 한없이 투명하면서도, 지나치게 무겁지 않으며, 또한 필요 이상의 자극적인 음색으로 과장하거나 겉치레에 치중한 연주를 뽐내지 않아 좋습니다만 소프라노 휘틀레시의 지나친 절제력이 옥의 티입니다.
그러나 시노폴리는 제가 막연하게나마 추상적으로 생각했던 4번에 대한 이미지를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코 악보상에 나타난 악상만으로 펼쳐지는 연주는 아닙니다. 내면의 깊은 세계를 통찰력있게 표현해주고 있는데 이로인해 디테일적인 묘사는 다른 연주보다 떨어지는 감이 있습니다만 대신 말러가 생각했던 이중적인 의도를 충분히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시노폴리의 다른 말러는 뭔가 어정쩡한 맛이 있었는데 여기서 만큼은 대단한 집중력과 표현력, 그리고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어 개인적으로 레퍼런스로 꼽고있는 음반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소프라노 반세(Juliane Banse)를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마티스 이후에 정말 <천상의 삶>을 천사와 같은 노래로 들려주는 최고의 가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녀의 긴 호흡과 투명한 울림은 참 아름답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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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6월 28일 waterman기자, ⓒ빗톡뉴스(bittal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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